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896년 [[카스티야|카스티야이레온]]에서 8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.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동에 종사하여 14살에 철도 노동자가 됐다. 아버지가 [[사회주의자]]이자 [[노동조합]] 활동가였기 때문에 그도 [[노동운동]]에 점차 깊숙이 관여했다. 이로 인해 1917년 총파업이 발생했을 때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. 이때 [[프랑스]]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망명하여 1920년까지 머물렀는데 그곳의 [[아나키스트]]들과 접촉하며 아나키즘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.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한다. 그는 동지들을 모아 스페인 국왕 [[알폰소 13세]]를 암살하려고도 했고, 아나키스트 노동자 조직인 [[전국 노동 연맹]]에서 활동하며 [[바르셀로나]]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. 또한 우익 세력에 의해 희생된 아나키스트에 대한 보복 공격, 군부 지도자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병영 습격 등의 굵직한 사건들에도 관여했다. 이러한 활동 때문에 그는 여러 번 감옥에 갔고 사형 선고를 3번이나 받았다.[* 이 사형선고는 [[스페인]], [[칠레]], [[아르헨티나]] 3국에서 각각 받았다. 모두 각국에서 그가 벌였던 아나키즘 활동 때문이었다. 그는 스페인에서의 상황이 녹록치 않았을 때 [[라틴 아메리카]]로 도피했었는데 물론 거기서도 아나키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.] 이후 스페인 왕정이 몰락하고 [[스페인 제2공화국|공화정]]이 수립되자 두루티는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당대의 [[아나키스트]] 그룹 중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성향을 보였다. [[프란시스코 프랑코]]가 공화정에 반발하여 [[스페인 내전]]을 일으키자 그는 아나키스트들을 모아 저항군을 이끌었다. 두루티는 1936년 11월 19일 마드리드 전투에서 가슴에 총을 맞았고 다음날 사망했다. 그의 정확한 [[사인#s-1|사인]]에 대해서는 국민군에게 사살되었거나 아군의 오발로 인해 사망했다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. 그의 사망 소식은 공화파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 바로 발표되지 않았고 11월 23일 바르셀로나에서 50만 명의 군중이 참여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